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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한·일 관계의 새 지평
등록일 2021-10-15 글쓴이 관리자 조회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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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15일 (금)

[특별기고] 한·일 관계의 새 지평
 
 
김재범
한미협회 부회장
전 주 우루과이 대사
전 연세대학교 국제학대학원 외교특임교수
10월 4일 취임한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제100대 일본 총리대신과 신임 각료들의 면면으로 보아 한일관계가 가까운 시일 내에 획기적으로 개선되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사실 한일관계가 악화일로로 치닫기 시작한 2006년 이래 9명의 일본총리가 잇따라 교체될 때마다, 그리고 2019년 5월 1일 나루히토 천황의 즉위와 더불어 레이와(令和)시대가 열림에 따라, 양국에서는 관계개선을 위한 계기가 마련되기를 기대했었고 2003년 이래 우리정부가 네 차례나 교체되는 동안에도 그와 같은 기대가 있었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울 뿐이다.
돌이켜보면, 불과 10여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일본 정계를 주름잡던 극우파 정치인들이 주동이 되어 독도문제 등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정치적 이득을 취하려 했던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정치인들이 국민의 여론에 떠밀려 반일적인 제스쳐를 취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근년에 들어 양국에서 서로 정반대의 현상이 빈번히 표출되고 있어 향후 관계개선의 전망을 더욱 어둡게 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우리정부는 핵심이익이 아닌 꽁치분쟁 등에 외교력을 낭비했는가 하면, 국가원수가 독도를 방문하여 상대방을 불필요하게 자극하였다. 또한 “위안부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다른 문제에 관해서도 일절 협의할 수 없다”는 입장을 무리하게 관철시키려 함으로써 득보다 실이 많은 결과를 초래했다. 그리고 일본의 대한 수출규제에 대하여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시효연장 유예방침으로 맞대응하는 등으로 인하여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 이렇게 볼 때, 한일양국이 그동안 말로는 미래지향적인 관계발전을 외쳐왔지만 진정으로 이를 원한다면 취해야 할 조치보다 삼가야 할 일이 더 많아 보인다.

한일관계의 발전을 저해하는 근본원인은 우선 역사적 사실에 대한 양국 일반국민의 의식이 크게 상반된 데 있다. 일본인들은 임진왜란 이후 400여 년간 한일 간에 전쟁이 없었고 이는 세계사에 유례없는 우호관계라고 생각하는 반면, 우리국민은 고려말기부터 일본조정의 사주 하에 끊임없이 괴롭혀온 왜구의 침략근성이 아직도 군국주의 습성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다. 우리 국민이 요구하는 일제강점기 잔혹행위에 대한 진상규명, 반성, 사과, 배상, 변상, 보상 등에 대해서도 일본은 1965년 한일 기본협정 및 청구권협정으로 이미 종결된 문제를 재론함은 국제법 위반행위라고 반박한다. 또한 친한파 내지 지한파로 알려진 일본인들마저 “일본제국이 한반도에 대단히 많은 투자를 했던 반면 중국에는 그렇게 하지 못했는데 한국인들은 이 점을 간과하고 있다”면서 이해를 구하려 한다. 한국인들로서는 이에 대해 어디서부터 어떻게 반론을 제기해야 할지 황당하고 당황스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우리 국민은 양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와 독일이 화해하여 유럽통합의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고 평화를 정착시킬 수 있었던 이유가 독일의 자발적이고도 끊임없는 반성과 사죄에 기인했음에 주목한다. 그러나 독일의 선례를 따를 수 없는 일본 측의 제반 사정을 잘 알면서도 이를 끊임없이 요구함은 비현실적일 뿐 아니라 현명하지 않다. 따라서 한일관계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서는 독불관계보다 영불관계의 선례로부터 착안함이 더 적절하다. 영국과 프랑스는 세계역사상 서로 전쟁을 가장 많이 한 나라인데, 현재 이들 양국 간의 관계는 화친(entente cordiale)이다. 이것이 바로 한일양국이 지향해야 할 장기적 목표라면, 1998년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으로의 복귀는 중기적 목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양국 최고지도자가 서로 의기투합하여 정치적 결단을 내리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일반 국제관계에서 정치군사부문의 우호관계가 성립되어야 그 효과가 경제, 통상, 사회, 문화 등 여타 부문으로 파급되어 전반적 관계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현상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정석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든지 이와 같은 하향식 접근법이 지난한 상황 하에서는 차선의 방책으로 상향식 접근법이라도 구사해야 할 필요성이 절실하다. 즉, 비교적 쉬운 문제, 작은 문제부터 해결해나감으로써 실적을 쌓아가고 신뢰를 축적해가는 방식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단기적으로 해결이 어려운 문제는 차후에 더 지혜로운 해결책을 찾도록 후대에게 인계한 덩샤오핑 식의 방법은 최선이 아니고 차선에 불과하더라도 해결이 가능한 문제부터 하나씩 차근차근 접근했다. 9월23일 뉴욕에서 개최된 한일 외교장관 회담에서도 어차피 강제징용, 성노예, 수출규제, 역사문제 등에 관해서는 양측이 각각의 입장을 설명하는 데 그쳤다.

결국 문제의 본질은 국가의 정체성(identity)과 국민의 가치(values)관에 귀착된다. 한일양국이 상이한 정체성을 서로 인정하고 상이한 가치관을 서로 존중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정체성이란 수천 년의 역사와 전통으로 면면히 이어온 문화적 차이에서 연유하므로 서로 장단과 우열을 비교하여 판단하려는 생각은 부질없다. 한일양국은 자유민주주의, 인권존중, 시장경제, 법의 지배 등의 대의를 공유하고 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당시 일본총리가 국회 시정방침 연설에서 “한국과 기본적 가치를 공유한다”고 표현한 것은 2014년에 이어 6년 만인 2020년 1월 20일이었다.

그러나 양국이 공유하는 가치관의 구현방식에는 구체적인 차이가 분명하다. 일본은 공화제 하의 대통령중심제를 채택한 우리나라의 정체를 존중하고 있으므로 우리나라 역시 입헌군주제 하의 의원내각제를 택한 일본의 정체를 존중해야 한다. 따라서 일본 국가원수의 공식칭호를 당연히 “천황”이라고 호칭해야 하며, 만약 그럴 수 없는 사정이 있다면 그것은 떳떳하지 못하다. 이는 상대를 비하함으로써 자신의 위치가 상대적으로 상승될 수 있다는 착각에서 기인하거나 “천황”이 “대통령”보다 우위에 있다는 오해 내지 열등감에서 비롯되었거나 반성이 없는 일본에 대한 복수 또는 화풀이의 일환으로 밖에 비쳐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과거사”라는 용어사용은 지양해야 한다. 그 이유는 1965년 또는 그 이전의 역사가 현재와 단절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그대로 살아 움직일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역사를 왜곡한 내용의 교과서로 후대를 잘못 가르치는 행위다. 그리고 소위 종군위안부는 당연히 “성노예”로 칭하고 국제적으로도 이 용어가 확립되도록 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동해명칭에 관해서도 2002년 한일월드컵 공동개최의 정신으로 되돌아가면 적절한 해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일양국의 거래관행도 서로 사뭇 다르다. 어느 쪽이 더 낫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우리나라는 선택과 집중을 중시하는 반면 일본은 연륜과 전통을 숭상한다. 우리 측이 국민정서나 감정으로부터 스스로 해방되어 상대방의 생각과 관행을 존중하는 가운데 지극히 냉정(cool)하고 업무적(businesslike)인 자세로 실적을 축적해나가야 한다. 그리고 국민과 국가와 정부를 대표하여 사용하는 언어는 좀 더 격조 높고 품위 있는 방식으로 구사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평화경제가 실현된다면 우리는 단숨에 일본의 우위를 따라잡을 수 있다”는 식의 표현은 삼가야 한다.

일본 신정부의 출범을 계기로 한일양국 정부가 우선적으로 착수할만한 사업 두 가지를 예시한다면 제7광구 공동개발과 한일해저터널 건설이 있는데, 이 둘을 시범사업으로 하여 향후 양국 간 다방면의 협력이 증진되기를 기대한다. 제7광구 공동개발이 우리나라 국익에 더 도움이 되고 해저터널 건설은 일본에게 더 이익이 되는 사업이라는 전제하에 동시 공동으로 추진하기가 적절하다.

한일양국 정부가 1974년 체결한 대륙붕 공동개발협정이 2028년 종료될 예정이며, 그 후에는 일본이 제7광구의 80%를 단독으로 개발하게 될 것이다. 이에 더해 중국이 일방적으로 설정한 방공식별구역에 이 지역을 이어도와 함께 포함시키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한·중·일 3국은 이미 자국의 관할수역임을 주장하는 자료를 대륙붕한계위원회(CLCS)에 제각각 제출한 상태이므로 한일양국의 선제적이고 전략적인 공동외교가 요망된다.

한일해저터널 구상은 1980년대부터 양국 조야에서 제안돼왔으나 일제강점기인 1917~43년간 처음 추진되었던 기억에 대한 저항 등으로 인하여 진전이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제 터널건설을 공약한 야당후보가 부산시장에 취임함으로써 탄력을 받을 수 있을 것이며, 중앙정부도 대일외교뿐만 아니라 국내 협치 본보기의 일환으로 지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토목기술이 일본보다 많이 앞서있는 데다 건설에 소요될 예상비용은 우리 측이 20%, 일본 측이 80%를 각각 부담할 계획이므로 경제성이 우리 측에게 훨씬 더 높다.

이에 더하여 우리정부가 한중일 3국간 협력이 지역통합(regional integration)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을 배가할 필요가 있다. 한중일 정상은 2019년 12월 청두에서 제8차 회의 개최한 이래 차기회의 일정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 국무총리가 참석하는 회의도 정상회의이므로 우선 차선책으로 이를 추진할 수 있을 것이다. 각료급 이하의 실무협력 실적이 상당히 축적되어 많은 진전을 이룬 분야도 있다. 또한 2019년 11월 제16차 공식협상 후 정체상태에 있는 한중일 자유무역협정(FTA)에 더 이상의 진전이 불가능하면 우선 한일 간 FTA나 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CEPA) 체결을 위한 협상을 개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떻든 일본과 중국이 서로 협력하거나 거래할 때 직통으로 하기 보다는 우리나라를 통하는 편이 더 편리하고 용이한 구도가 정착되도록 만들어 나가야 한다.

서울소재 3국협력사무국의 기능을 대폭 강화함은 물론, ASEAN+3 등의 협의체에서도 우리나라가 중국과 일본의 중간에 서서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정직한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확대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나라가 일본에 비해 중국으로 더 경사된 듯이 비쳐지는 모습은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밖에도 우리나라는 일본이 속하는 다자협력체에 적극 참여하여 여러 사안에서 일본의 입장을 지지하고 이해가 상충하는 경우는 선제적(proactive)으로 절충해야 한다. 지난 6월 G7 정상회의에서 우리 대통령이 쫓아다니고 일본총리는 경계했다던 모습에 대한 국제사회의 평가는 긍정적인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한일관계 개선작업에 진전이 있는 대로 북한과 일본 간의 관계개선을 위한 우리정부의 기여도 가능할 것이다. 먼저 북한에 억류중인 우리 전쟁포로, 납북자 및 그 가족의 송환을 추진하고 성과가 있는 대로 이를 본보기로 하여 일본인 피납자의 생사확인 및 귀환, 북한의 대일 배상금 청구, 북일 수교 등을 위한 협상과정에서 북일 양측 모두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남북관계에도 다시 선순환을 도모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정부는 기시다 총리가 취임 후 첫 기자회견에서 한일관계는 거론하지 않은 가운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직접 마주할 각오”라고 언급한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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