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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격사회 423] 허남정 고문의 '제철·교육보국에 평생 바친 '철강왕''
등록일 2021-08-05 글쓴이 관리자 조회 79

감격사회 423호. 발행일 2021.08.05

 

제철·교육보국에 평생 바친 '철강왕'

허남정
에스포유 회장

그가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난 지 올해로 10년이다. 지난 6월 26일에는 부산 기장에 박태준 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나는 우리 산업화 시대의 영웅 가운데 박태준을 상대적으로 높게 평가한다. 공기업의 대표임에도 투철한 주인 정신으로 포스코(구 포항제철)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일구며 ‘산업화 시대의 쌀’인 철강재의 자립을 이뤘기 때문이다.

포스코는 “빈곤타파와 경제부흥을 위해서는 제철소 건설이 필수적”이라는 대통령 박정희의 의지의 산물이었다. 박태준은 포스코의 성공에 목숨을 걸었고 박정희는 건설 기간 중 13번이나 현장을 찾았다. 1987년 박태준은 철강 분야의 노벨상이라는 베서머 금상을 수상하며 20세기 철강왕에 등극했다. 교육에 대한 박태준의 높은 관심은 포스텍(구 포항공대) 설립으로 이어졌다. 세계 최고의 이공계 대학을 꿈꾸며 설립한 이 대학은 이제 세계 명문 공대로 우뚝 섰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짊어질 우수 인재를 배출하며 한국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 출현을 기다리고 있다. 박태준은 드물게도 생존 시 위인의 반열에 올랐다. 위인전의 작가는 ‘태백산맥’의 조정래였다.

박태준과 나의 작은 인연은 1982년 12월 인천으로 향하는 기내에서 시작됐다. 한국외대 통역대학원 2년 차 교육을 일본에서 마치고 귀국하는 길이었다. 모 일간지에 실린 원칙주의자 박태준의 칼럼은 내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와 함께 일을 하고 싶다는 강한 소망을 품고 신문기사를 스크랩했다. 졸업을 앞두고 진로를 놓고 고민하던 나를 박종태가 한일경제협회로 인도했다. 그는 박태준의 측근으로 초대 포항제철소장 출신이었다.

퇴임 후 중소기업인으로 변신한 50대 후반의 그가 1년 후배로 대학원에 입학한 것이다. 그가 나를 박태준에게로 인도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일경제협회는 한·일 두 나라 사이의 민간 경제협력을 뒷받침하기 위해 1981년 초 제5공화국 주도로 설립됐다. 설립자로서는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정주영 회장 등 경제5단체장과 포항제철 박태준 사장이 이름을 올렸고 설립자 대표인 박태준이 회장을 맡고 있었다. 1983년부터 27년이라는 긴 세월을 박태준의 비전을 함께하며 한·일 경제협력 현장을 누볐다. 그리고 퇴임 후에는 한양대 국제학대학원에서 박태준의 리더십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며 그와의 인연을 이어갔다. 1993년 문민정부 출범 직후 정치적인 박해를 피해 일본으로 망명한 박태준. 그는 평생 처음으로 도쿄(東京)의 작은 아파트에서 아내와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보냈다. 당시 그의 주요 일과는 걷기와 독서였다.

“매일 아침 긴자(銀座)의 서점까지 걸어가서 신간을 둘러보고 구입해서는 집에서 읽었어요. 지진이 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어요. 그때 아버지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선반의 책이 쏟아지지 않도록 받치는 일이었어요”라고 부인 장옥자는 회고한다. 그녀는 남편 박태준을 아버지라 부른다. 힘든 4년여의 망명 생활 동안 치열한 독서로 닦은 내공은 후일 큰 힘을 발휘했다. 외환위기 극복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리고 국무총리를 끝으로 공직을 마무리했다.


※ 본 기고문은 문화일보(www.munhwa.com)에 기고된 칼럼입니다.  

글쓴이 / 허남정

에스포유 회장
한일산업기술협력재단 전무이사
동북아공동체문화재단 정책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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