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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격사회 318] 허남정 회장의 '민간외교관 허남정의 일본 종단기 (최종호)'
등록일 2019-06-12 글쓴이 관리자 조회 1491

감격사회
감격사회 318호. 발행일 2019.06.12


민간외교관 허남정의 일본 종단기 (최종호)

허남정
에스포유 회장

허남정 에스포유 회장은 한일 관계 개선을 기원하며 4월 1일부터 61일 간 일본 열도 종단에 나섰습니다. 1500㎞ 구간을 직접 걸으며 현지인과 소통하고, 한일 우호증진을 기대하는 한국인의 마음을 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동안 한국경제신문에 기고되고 있는 허남정 회장의 종단기를 연재해드렸습니다. 이번호는 허남정 회장의 일본 종단기의 마지막호 입니다.

아모리오카 여관을 일찍 나섰다. 여주인의 친정어머니가 떠나는 나를 현관에서 배웅했다.

신칸선으로 신아오모리역에 도착. 재래선으로 갈아타고 5 정거장 앞의 나미오카역에서부터 걸었다. 오늘은 일본의 땅 끝 아오모리다.

국도를 걷는데 인도가 제대로 없다. 대형 트럭이 빠른 속도로 지날 때는 몸이 흔들렸다. 도로변에 마을이 없고 어쩌다 보이는 마을은 도로 저 멀리 깊은 산골짜기에 있다.

아오모리 시내에 들어서기까지 이런 길이 이어진다. 그동안 걸어온 길 가운데 가장 무미건조한 길이다. 아오모리는 역시 오지다. 오늘은 27킬로를 걸었다.

아오모리역에 도착해서 열차 시간을 확인했다. 내일은 북해도의 초입 하코다테다. 이제 일정도 막바지로 접어들었다. 하코다테까지는 해저터널을 통과해야 하는데 신칸선만 다닌다.

저녁에 최동환 사장을 처음으로 만났다. 그리고 호시노도 삼십여 년만에 만났다. 그는 오랜 세월 만나지 않았지만 마치 어제도 만났던 사람처럼 편안했다.

그는 이곳 미치노쿠 은행의 OB인데 과거 업무 관계로 교류가 있었다. 옛날의 추억 그리고 삼십여 년 살아온 얘기를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가 스마트폰에 저장된 손주 사진을 보여 주었다.

다음날은 하코다테로 이동했다. 해저터널을 지나는데 기분이 묘하다. '세이칸 해저 터널 프로젝트'는 쓰가루 해협 연락선 침몰 사고를 계기로 가능성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1954년 발생한 '토야마루 호' 사고는 타이타닉 호 이후 최대 규모의 해난 사고였다. 1000여 명의 희생자가 났다. 공사는 1961년에 시작되어 27년이 걸렸는데 1988년에 개통이 이루어졌다.

총길이는 53.85킬로이며 해저구간만 23.3킬로다. 터널의 최저 부분은 해발 마이너스 240미터로 수심 140미터의 100미터 아래에 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긴 터널이며 2016년에는 신칸선도 개통되었다.

하코다테역에 도착해서 우선 숙소를 확보한 다음 1량짜리 재래선을 타고 모헤지역으로 갔다. 이 코스는 이곳 관광안내센터가 추천해 주었다.

최 사장과 같이 하코다테역을 향해 해안 국도를 걸었다. 저 멀리 하코다테산의 전망대가 보인다. 8킬로 지점에서 겨우 나타난 식당에서 라면으로 늦은 점심을 해결했다.

식당을 나서는데 주인이 얼음같이 차가운 캔커피를 서비스라며 건네준다. 먼길을 걸어온 나를 환영하고 격려하려는 뜻으로 보인다.

길을 걸으며 사람들과 부지런히 인사를 나누었다. 그들은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 그리고 남쪽 가고시마에서부터 걸어서 왔다는 얘기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오늘은 23킬로를 걸어 누적거리 1000킬로를 돌파했다.

저녁에 카마다를 만나 이곳의 싱싱한 회와 초밥을 먹었다. 계산을 우리가 하겠다고 했지만 그녀는 단호했다. 하코다테를 찾아준 귀한 손님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녀를 지난 3월 말 '제7회 조선통신사 우정 걷기 행사' 전야제에서 처음 만났다. 65세 때부터 3년간 친구와 같이 북해도를 일주한 맹렬여성이다. 북해도는 둘레가 2,800킬로에이른다.

카마다와 헤어진 후 최 사장과 케이블카를 타고 하코다테산 정상에 올랐다. 이곳 전망대에서 백만불 짜리라는 일본 최고의 야경을 즐겼다. 최 사장이 그녀를 위해 작은 선물을 구입했다.

다음날 아침 8시 하코다테역에서 카마다를 다시 만났다. 그녀의 지인 스가와라가 함께였다. 스가와라의 남편이 차로 우리들을 출발 장소인 하코다테 산 입구까지 데려다주었다.

차로 언덕길을 오르는데 좌측으로 공동묘지가 보인다. 카마다가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가족 묘를 가리켰다. 그는 메이지 시대의 대표적인 단가 시인이다. 그의 작품은 일본의 국어 교과서에 빠짐없이 실려있다.

우리 근대의 서정시인 백석이 그의 시를 좋아해서 필명을 백석으로 했다고 알고 있다. 돌 석자는 일본어로 '이시'라고 읽는다.

그의 고향은 북해도의 바다 건너 모리오카인데 왜 이곳에 묻혔을까. 평생 고생만 시킨 사랑하는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에서였을까. 이곳 북해도는 아내의 고향이다. 결혼을 일찍한 그는 26살로 요절했다.

군국주의에 반대한 저항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시를 마음속으로 조용히 읊조려 본다.

친구가 모두 나보다 잘나 보이는 날은/ 꽃 사들고 돌아와 아내와 놀았노라

동쪽 바다의 조그만 섬 바닷가 백사장에서/ 나 울다 젖은 채로/ 게와 어울려 노네


인근 다치마치 곶에 서서 망망대해를 바라보았다. 독특한 바다다. 마치 유조선에서 흘러나온 기름띠가 여기저기 떠 있는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해류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출발에 앞서 전망이 좋은 그곳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하마마쓰에서 관광차 왔다는 여성에게 부탁을 했다. 그녀는 내가 한국인인 것을 알고 너무 좋아한다. 최근에 전주와 서울을 다녀왔다고 했다.

하코다테 산 길을 걸었다. 19세기 중엽 신정부군에 저항한 막부군과의 마지막 전투가 벌어진 곳이 하코다테다. 죽은 저항군 사무라이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위령비가 서 있었다.

그리고 토야마루 호 해난사고의 희생자를 기리는 위령비도 보인다. 1954년 발생한 이 사고로 승객과 승무원 총 1,309명중 1,159명이 희생되고 150명은 구조되었다. 희생자 전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카마다의 오빠도 이 사고에서 목숨을 건진 장본인이다. 사고 소식을 듣고 달려간 아버지는 희생자들 속에서 아들의 시신을 찾지 못했다. 가족들이 장남을 잃은 슬픔에 잠겨 있는데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구조된 것이다.

당시 태풍 '마리'의 위력은 엄청났다고 한다. 엄마 아버지는 문짝을 필사적으로 붙들었고 그녀는 란도셀 가방을 메고 방 안을 왔다 갔다 했다고 한다. 초등학교 1학년인 그녀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새 책가방이었다.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고급 주거단지를 둘러보았다. 근대에 지어진 공공건물 성당 교회 그리고 외국 영사관 건물들이 잘 보존되어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외국인 묘지도 둘러보았다. 피장자는 주로 러시아인이다. 근처의 모토마치 공원에서 카마다가 준비해 온 도시락을 먹었다. 토요일 좋은 날씨에 마치 피크닉을 나온 기분이었다.

오늘 저녁의 숙소를 구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어두워지기 전에 삿포로에 들어가야 한다. 게다가 오늘이 토요일이라 그녀들의 시간을 더 이상 뺏는 것도 미안한 일이다.

빠른 걸음으로 역에 도착하니 다행히도 12시 15분에 출발하는 열차가 있었다. 6분 전이다. 그들에게 서둘러 인사를 하고 홈을 향해 뛰었다. 자유석 칸에 빈자리가 남아 있었다. 삿포로까지는 특급열차로도 4시간이 걸린다.

걱정을 했지만 삿포로 역 관광안내센터에서 친절하게 가까운 숙소를 소개해 주었다. 저녁에 최동환 사장을 만나 이곳 최고의 번화가 스스키노로 갔다. 고깃집에서 그가 내 부족한 영양을 채워주었다.

일요일에는 미와 슈이치로군이 다니는 '신삿포로 성서교회'에 갔다. 나는 2년 전 그의 결혼식에서 축사를 했다. 그는 서울 동부이촌동에 있는 일본인 교회 미와 목사의 아들이다. 현재 북해도 대학의 교수로 있다.

11시부터 시작하는 예배에 참석하고 점심을 먹으며 신도들과 교류했다. 이곳은 박영기 목사가 33년 전에 개척한 교회인데 신도들은 대부분이 일본인이다.

북해도는 역사가 150년 남짓 되는 신개척지다. 본토에서 흔한 신사와 절이 이곳에서는 그리 눈에 띄지 않는다. 새로운 문화에 대한 거부감이 상대적으로 적은 곳이다.

오늘 서울에서 후배 최석원 사장이 온다. 그와 만나기로 한 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다. 교회 다녀오는 길에 열차에서 내려 약 10킬로를 걸었다.

다음날 최석원 사장은 오타루 등 삿포로 관광을 하기로 했다. 그는 일본과의 무역을 오래 해서 일본어에 능하며 삿포로도 낯선 곳이 아니었다.

최동환 사장을 삿포로 역에서 만나 해발 600미터의 모이와산을 올랐다. 오늘은 삿포로의 기온이 30도가 넘는 이상기온으로 도로를 걷기는 힘든 조건이다.

월요일인데도 생각보다 산을 오르는 사람이 많다. 만나는 사람들과 열심히 인사를 나누었다. 등산로 입구에는 '곰이 출몰하니 주의하세요'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준비한 도시락을 먹고 다시 산을 오르는데 모녀로 보이는 두 여성이 내려온다. 큰 소리로 인사를 했다. "곤니치와!(일본인들의 낮 인사)" 그런데 이들은 한국인들이다.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 전망대까지 왔다가 걸어서 내려 가는중이라고 했다. 엄마는 작년에 나가노현의 북알프스 3,000 고지도 올랐다고 했다. 맹렬 한국인이다.

나무 그늘 속을 걸었지만 34도의 한여름이다. 땀이 흘러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다. 수건을 준비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정상에 올라 전망대 자판기에서 뽑아 마신 콜라의 맛이 환상적이었다.

5시간 정도 산길을 걸었다. 내려와서는 가까운 전철역까지 꽤 걸어야 한다. 땡볕에 긴 아스팔트 길이 만만치 않다. 이 한적한 길에서 손님을 내려주고 돌아가는 택시를 운 좋게 만났다.

택시 기사는 과거 무역 관계로 한국에 이십여 차례 다녀왔다고 했다. 그는 지금도 주 2회 정도는 김치를 사서 먹는다. 김치만 있으면 밥 한두 공기는 뚝닥 해치운다고 했다.

저녁에는 '삿포로 비루엔'에서 최동환 사장의 송별회를 가졌다. 그는 다음날 귀국한다. 중국인 단체손님들이 많아 고기와 맥주를 '무한리필'하는 대식당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주문형 식당에서 오랜만에 양고기 징기스칸과 공장에서 갓 생산된 삿포로 생맥주를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최동환 사장으로부터 많은 격려를 받았다. 일본과 중국 무역을 오래한 그는 일본어도 유창했다. 좋은 친구를 얻었다.

오늘은 이곳 삿포로의 유키와 같이 걷는다. 30도를 넘는 이상기온이 계속되어 걱정을 했는데 오늘은 걷는데 최적의 날씨다.

최고기온이 어제보다 10도나 낮은 22도인데다 시원한 바람마저 분다. 그리고 간간이 땀을 씻어주는 비도 흩뿌린다.

삿포로역에서 유키와 그녀의 친구 칸을 만났다. 유키는 하코다테에 사는 카마다의 친구다. 두 사람 다 금년 제7회 조선통신사 우정걷기 행사에 참석해 서울에서 부산까지 걸었다.

토요히라가와 강변 길을 걸었다. 삿포로의 한강이다. 연어가 올라온다는 강인데 물살이 빠르고 수량이 풍부한 일급수다.

유키는 60세 때 골반 인공관절수술을 받았다. 의사는 더 이상 걷지 말라고 했다. 그녀는 걷기 위해서 힘든 수술을 받았는데 좋아하는 걷기를 그만둘 수 없었다고 했다.

대수술 후 65세 때에는 3년간 에 걸쳐 북해도 2800킬로를 카마다와 함께 일주했다. 그리고 2년마다 개최되는 조선통신사 행사에도 참여해 오고 있다.

인간 승리다. 오늘은 20킬로인데 문제없냐고 농담 삼아 물었더니 "나는 푸로 입니다"라고 정색을 했다. 좋은 길에 좋은 날씨다. 불어오는 바람이 싱그럽다.

그녀의 친구 칸도 걷기를 좋아한다. 그녀는 유키에 앞서 북해도를 일주했다. 걸으며 그녀가 들려준 곰 이야기가 재미있다.

그녀가 40대 초반에 여동생과 초등학교 취학 전의 남자 조카를 데리고 산을 올랐다가 중간 크기의 곰을 만났다고 했다.

어린 조카는 동물원에서 곰을 여러 차례 본 일이 있어 야생 곰을 보고는 "야! 곰이다!!!"라며 좋아했다. 그렇지만 어른들은 순간 몸이 얼어붙었다.

그녀는 여동생에게 조용히 곰의 눈을 응시하라고 했다. 도망을 가면 쫓아온다. 그들은 곰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마주 보았다.

그리고 "만약 곰이 덤벼들면 내가 먹이가 될 테니 너는 아들을 데리고 도망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녀는 독신이었으며 5남매 중 맏딸이었다. 큰 딸이 역시 다르다.

곰과 3명의 대치상태가 한동안 계속되었다. 곰은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6개의 눈동자에 자신이 없었는지 슬금슬금 숲 속으로 사라졌다고 했다.

최석원 사장은 15킬로 지점에서 숙소로 돌아갔다. 그동안 발바닥 문제로 위축되어 있었는데 조금은 자신감이 붙었을 것이다. 유키는 그가 걸으며 아픈 표정을 보이지 않았다며 '젠틀맨'이라고 칭찬했다.

삿포로역까지 20킬로를 걸었다. 숙소의 최 사장을 불러내어 역 근처의 이름난 스시집으로 갔다. 주문받으러 온 종업원이 3시까지가 런치 타임이라고 했다. 시계를 보니 3시 3분 전이다.

서둘러 주문을 했다. 런치의 양만큼 다른 시간대에 먹으려면 돈이 두 배는 들 것이다. 오늘은 운이 따른다고 유키가 좋아한다. 손님이라고 우리가 대접을 받았다.

다음날 아침 식사를 하러 스스키노로 나갔다. 까마귀 떼가 주위를 바쁘게 날아다닌다. 환락가라 음식 찌꺼기 등 먹을 게 많다. 이곳 까마귀는 살이 포동포동 오르고 윤기가 흐른다. 사람을 겁내지 않는다.

아사히카와역 3 정거장 못미쳐서 나가야마역에서 내렸다. 국도로 나서서 걷기 시작하는데 웬일인지 울컥 감정이 복받쳐 오르며 눈물이 난다.

오늘로서 걷는 일정은 마지막이다. 지난 두 달 나름대로 열심히 걸으며 많은 일본인과 교류했다. SNS를 통해 국내와도 부지런히 소통했다. 오늘은 10킬로를 걸었다.

먼저 도착한 최 사장이 좋은 호텔을 저렴한 가격으로 예약했다며 문자로 알려왔다. 3시경 체크인을 한 후 그와 함께 '미우라 아야코 기념 문학관'으로 갔다.

청주의 모 교회에서 단체로 견학을 왔다. 외국 수종 시범림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곳은 아야코의 데뷔작이자 최고의 히트작인 소설 '빙점'의 무대가 된 곳이다.

'시범림 속에는 관리인의 낡은 집과 빨간 지붕의 창고와 외양간이 있었다' 소설 빙점에서 아야코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이 관리인 집의 자리에 그녀의 문학기념관이 들어섰다.

나는 중학생 시절 '빙점'을 읽었다. 당시 그녀의 인기는 지금의 무라카미 하루키 이상이었다. 내가 이곳을 마지막 일정으로 정한 것도 그녀를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1964년 '아사히신문 1,000만엔 현상소설 공모전'에 1등으로 입선했다. 쟁쟁한 기성 작가들을 제친 42세 무명 가정주부의 쾌거에 세상이 놀랐다.

하늘이 위대한 인물을 내기 위해서는 남들이 겪지 않은 혹독한 시련을 준다고 한다. 그 시련에 꺾이지 않고 이겨내었을 때 비로소 하늘은 그 사람에게 위대한 생애를 선물로 준다.

아야코는 군국주의 일본에서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 교사를 7년간 지냈다. 패전 후 그녀는 군국주의 교육의 잘못을 깨닫고 1946년 교직을 떠난다.

여기서부터 그녀의 방황이 시작되었다. 폐결핵에 걸려 입원했지만 술 담배는 여전했다. 당시 폐결핵은 죽을병이었다. 살아갈 의미를 잃은 자포자기의 행동이었다.

이후 결핵성 척추 카리에스로 발전되며 그녀는 13년간이나 꼼짝 못 하고 깁스 베드에 누워 지냈다. 자기 손으로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를 수렁에서 건져 낸 사람은 어린 시절 친구이자 연인인 마에카와 타다시였다. 그는 병원을 방문하거나 편지 등을 통해 그녀를 끈질기게 설득했다.

그녀를 갱생시키고 크리스천으로 인도할 수만 있다면 자기 목숨을 바치겠다고 기도했다. 타다시는 폐결핵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다.

타다시의 사후 그의 진심을 깨달은 아야코는 세례를 받고 그렇게 혐오했던 크리스천이 되었다. 타다시는 위대한 작가 미우라 아야코를 만들기 위해 세상에 온 한 알의 밀알이었다.

연인과 사별한 후 그녀는 또 한 사람의 헌신적인 신앙인 미우라 미쓰요를 만나 결혼했다. 37살로 당시로서는 만혼이었다. 결혼 후에도 병약한 그녀는 암에 걸려 회복과 재발을 반복했다.

그러나 그녀는 암에 감사했으며 하늘이 준 선물이라 고백했다. 하늘이 인간에게 주는 고통은 반드시 의미가 있으며 그것을 극복할 길도 함께 주신다는 믿음이 있었다.

손이 마비된 아야코는 구술로 집필 활동을 계속했다. 말년에는 파킨슨병으로 고통을 겪었다. 그렇지만 죽는 순간까지도 집필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남편 미쓰요는 공무원을 그만두고 아내의 집필 활동을 도왔다.

아야코의 구술을 받아 적어 원고로 만드는 일이 그의 평생의 일이 되었다. 그녀는 1999년 77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35년간 총 84권의 책을 출간했다. 그중 80권이 구술에 의한 것이었다.

다음날은 그녀의 또 한 권의 베스트셀러 《시오카리 토우게(한국어 번역판 제목 '설령'》의 현장을 찾았다. 소설의 주인공인 실존 인물 나가노 마사오가 순직한 곳이다.

마사오 역시 아야코처럼 기독교를 경멸했으며 결코 크리스천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던 사람이다. 그런 마사오가 친구의 여동생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녀의 밝고 항상 기쁨에 넘친 모습의 뒤에 기독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는 고뇌한다. 결국 그는 세례를 받고 크리스천이 된다.

그 운명적인 날은 '유이노' 즉 결혼 신청을 위해 사주단자를 가지고 그녀의 집으로 가는 날이었다. 시오카리 고개에서 객차의 연결고리가 알 수 없는 이유로 풀린다.

눈 덮인 경사로를 객차가 무방비로 굴러 내려갔다. 승객들의 비명과 아우성이 들려 온다. 차량이 커브로 접어드는 순간 그가 선로로 몸을 날렸다. 열차는 멈추어섰고 수십 명이 목숨을 구한다.

20세기 초의 일이라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던 그가 미우라 아야코의 소설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이곳 시오카리역에는 그의 현창비가 서 있고 언덕 위에는 '시오카리 토우게 기념관'이 있다.

기념관 정면에 요한복음 12장 의 말씀을 써놓은 현판이 걸려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일본 열도를 걸으며 많은 사람과 소통했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위대한 인생을 살다간 몇몇 일본인들을 만났다. 그들은 내 영혼을 정화시키고 마지막 여정을 풍성하게 만들어주었다.

출국하는 날 아침. 공항으로 가는 6시 리무진 버스를 타기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다. 미우라 아야코의 숨결이 느껴지는 이곳 아사히카와 땅을 조금만 더 걷기로 하자.

그동안의 누적거리는 1,108 킬로다. 버스에 오르기까지 3킬로를 더 걸었다. 1,111킬로. 두 다리에 2개의 스틱을 짚고 일본 열도를 종단했다는 의미를 스스로 부여했다.

당초 목표에는 미달하지만 완주했다는데 의미를 두고 싶다. 하루 평균 25킬로를 걷겠다고 작정했지만 목표에는 못 미친다. 그렇지만 평균 22킬로 정도 걸었으니 B+는 된다.

되돌아보니 내 의지로 걸은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걸어왔다는 느낌이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다. 감사의 마음을 가슴에 새긴다.

당초 우려와 달리 일본인들은 우호적이었다. 하지만 최근의 정치적인 갈등으로 대한민국 국가 이미지는 나빴다. '한국인은 좋은데 한국은 싫다'가 오늘 일본 국민의 대한민국 정서다.

4월 1일 입국하는 날 일본의 새 연호의 발표가 있었고 걷는 중에 일왕이 교체되었다. 구시대가 가고 새 시대가 시작되는 역사적인 순간에 일본 열도를 걸었다는 것이 내게는 행운이었다.

인천으로 가는 저가항공 기내에서 비빔밥을 주문했다. 들어간 재료를 살펴보니 한국 중국 일본 미국 인도 파키스탄 에티오피아 등 다양한 나라에서 왔다.

글로벌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일본을 보는 시각은 여전히 국내에 갇혀 있다. 아직도 일제 식민지 시절의 시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한일 간에 놓인 여러 현안은 오래된 고질병이다. 쉽게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칫 잘못 건드리면 오히려 문제가 꼬이고 커진다. 급기야 국민들의 혈압은 높아지고 양국 관계는 악화일로를 치닫는다.

국익이 크게 훼손된다. 경제분야에서 평생을 살아와 한일관계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절감한다. 먹고 사는 일 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몇 가지 한일 간의 현안사항은 평생 안고 가야 할 고질병이라 생각하고 더 악화되지 않도록 잘 관리하며 사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세월이 약이다.

양 국민 의식의 저변에는 반일 혐한 감정이 도사리고 있다. 민족감정과 연계되어 휘발성이 강하다. 자칫 잘못 건드리면 폭발한다. 그리고 한 번 불이 붙으면 걷잡을 수 없다.

가해자 피해자로 상호 입장이 달라 서로 자기에게 유리한 내용만을 기억하고 이를 확대 해석한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진실이라고 확신한다. 절반의 진실을 100% 진실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양국 관계의 악화 속에서도 민간교류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것이 매우 다행스럽다. 상대의 매력을 알고 이를 즐기려는 사람이 늘고 있다.

1년에 1천만 명 이상의 양국민이 상대국을 방문한다. 그곳에 가면 정치권의 이념 공방이나 언론의 선정적인 보도가 얼마나 비현실적이며 공허한 것인지 깨닫는다. 답은 현장에 있다.

작금의 악화된 양국 관계를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루속히 정상화시켜야 한다. 정치권 경제계 그리고 언론이 적극 나서서 각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

이것이 국익에 부합하고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존경받는 길이다. 그리고 중국이 우리를 가볍게 대하지 못하게 하는 길이기도 하다.

이사 갈 수도 없는 한일 두 나라. 앞으로의 100년도 선린우호 관계는 지속되어야 한다. 그것이 상호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 본 기고문은 한국경제신문(http://www.hankyung.com)에 투고하는 칼럼을  
연재한 것입니다.


 

글쓴이 / 허남정

국제학 박사
(주)에스포유 회장
(사)동북아공동체연구재단 정책자문위원
전 한일경제협회 전무이사
전 (재)한일산업기술협력재단 전무이사
저서 「박태준이 답이다(씽크스마트,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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