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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격사회 286] 이승율 이사장의 '역경의 열매(1)'
등록일 2018-07-03 글쓴이 관리자 조회 2302

감격사회
감격사회 286호. 발행일 2018.07.03


[역경의 열매] 이승율 한국기독실업인회(CBMC) 중앙회장(1)

이승율 동북아공동체연구재단 이사장(한국기독실업인회(CBMC) 중앙회장)의 삶과 신앙 간증 수기가 2018년 6월 18일 부터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로 매일 연재되고 있습니다.(정리= 정재호 국민일보 선임기자)
이승율 이사장의 간증 수기를 <감격사회>에서 5회분씩 편집하여 연재해 드립니다.

이승율 약력=△1948년 경북 청도 출생 △동국대(학사), 동국대대학원(석사), 중국옌볜대학(석사), 중국중앙민족대학(박사) 졸업 △옌볜과기대·평양과기대 대외부총장 역임 △반도이앤씨 회장 △참포도나무병원 이사장 △동북아공동체연구재단 이사장 △신아시아산학관협력기구 이사장 △한국기독실업인회 중앙회장 △온누리교회 장로



<1> 방황 끝에 만난 하나님… 오직 선교의 길로

나는 올해 고희(古稀)다. 동년배들이 거의 다 사회적으로 은퇴한 나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에게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는 지상명령을 주셨다. 지난 2월 한국기독실업인회(CBMC) 중앙회장에 선출된 것이다. 임기 2년이다. 한국CBMC는 국내에 273개, 해외에 130개 지회를 둔 글로벌 조직이다. 크리스천 기업인과 전문인 7500여명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이승율 장로가 지난 2월 한국CBMC 중앙회장에 선출된 뒤
국민일보와 인터뷰를 갖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나는 젊어서 궁극의 진리를 탐구한답시고 방황했다. 어린 시절 너무 일찍 실패와 좌절을 경험했다. 청소년기 반항 기질이 내 안에서 자라났고 그래서 남들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결국엔 인간의 한계를 처절하게 맛봤고 세상 속을 부유하면서 살았다. 그 시절 나는 괴테의 파우스트 화신이라고 생각했었다. 결혼하고 뒤늦게 들어간 대학에서 불교철학으로 진리를 찾고자 했고, 사업의 길에 들어서도 술과 담배에 절어 살면서 하나님을 멀리했다.

고1 때 만난 아내는 25년간 나를 위해 눈물로 기도했고 아이들의 금식기도와 간구가 더해져 나를 주님 곁으로 인도했다. 마흔셋에 하나님을 만나는 지각생이 된 셈이다. 가족들 손에 이끌려 처음 간 기도원에서 나는 특별한 은혜를 받았다. 불교철학과 파우스트를 통해 얻고자 했던 진리를 극적으로 체험했다. 그토록 갈구했던 것들을 ‘실로암의 눈먼 소경’ 이야기(요한복음 9장)를 통해 비로소 찾은 것이다.

거듭난 이후 나의 길은 오직 하나님을 향한 사역의 길로 바뀌었다. 마태복음 20장 ‘포도원의 품꾼’ 비유처럼 하나님은 오후 늦게 나타난 나를 똑같이 귀하게 써주셨다. 나는 30년 가까이 서울을 홈베이스로, 평양과 옌볜 베이징 상하이 우루무치(중국), 타슈켄트(우즈베키스탄), 알마티(카자흐스탄), 이스탄불(터키) 등 한반도와 동북아, 그리고 실크로드를 연결하는 자비량 선교사역을 위해 달려왔다. 코스타(KOSTA·해외유학생수련회)에 참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국내 외국인 학생들을 섬기는 국제학생회(ISF) 설립에까지 발을 들여놓았다. 무엇보다 옌볜과학기술대와 평양과학기술대 설립과 운영에 참여하면서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에 눈을 떠 필생의 선교 비전으로 삼게 됐다.

나는 사역의 과정에서 먼저 무엇을 하겠다고 계획한 일이 없다. 그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을 뿐인데 하나님의 손길이 나를 그런 길로 인도하셨다. 돌이켜보면 암흑 속에서 방황하긴 했지만 남들이 가는 길을 갔다면 옌볜과기대와 평양과기대, 한반도와 동북아가 나의 사명이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은 늦게 나타난 나를 품꾼으로 써주시고 먼저 온 자들과 동일한 품삯까지 챙겨주셨으니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인가. 나를 보고 사람들은 “나중 된 자 먼저 된다는 말씀이 실감 난다”고 할 정도로 차고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니 하나님께 영광 올리는 나의 사명에 중단이란 없다. “하나님, 제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있습니다.”

정리=정재호 선임기자 jaehojeo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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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원하던 중학교 못 가 비뚤어진 생활

나는 1948년 경북 청도에서 전통적 유교 집안의 5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종영과 어머니 박정리는 일제 강점기 소학교 동창이셨다. 두 분은 같은 반에서 공부했는데 어머니가 반장을 했다고 한다. 외동아들로 귀하게 태어난 아버지는 대구에 있는 경북중에 유학을 간 반면 자식 많은 집안의 다섯째 딸인 어머니는 진학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6·25전쟁 때 학도병으로 차출돼 죽을 고비를 넘긴 끝에 살아 돌아와 경상북도 교육공무원이 되셨다. 유가의 가풍에서 자란 아버지는 어려서 서당에서 한문을 익혔고 개인전을 열고 대구화단에서 평가받을 정도로 글씨와 그림에 능하셨다. 어머니는 소학교밖에 안 나왔지만 생활력이 강하고 똑똑하셨다. 결혼 이후 불교에 귀의해 대구불교여신도회 지부 회장을 지내셨다. 전국 주요 사찰마다 내 이름을 올리고 불공을 드릴 정도로 유명한 보살이었다.


▲ 1998년 4월 이승율 회장의 아버지 칠순 잔치 때 부모와 부부가 함께한 사진.
아버지는 1년 후 간암으로 돌아가셨는데 입원 중에 주님을 영접했다.
왼쪽부터 아버지 이종영, 어머니 박정리, 아내 박재숙, 이 회장.

그러니 나는 유교와 불교의 가풍을 이어받고 자란 셈이다. 부모의 훈계와 질책을 받으며 자랐고 맏이로서 의무감이 컸던 기억이 난다. 청도 고향에서 2학년 때 대구 중앙초로 전학했다. 아홉 식구가 셋방살이를 했다. 그러다 보니 4∼6학년 땐 친구 집에 가서 함께 공부도 하고 먹고 자는 일이 많았다. 공부 잘하는 반장이었기에 통했다. 운동도 잘해 5학년 때엔 야구부에 들어갔다. 그 시절 유달리 탐구정신이 강하고 한번 일에 몰두하면 끝을 봐야 했던 성격이었다.

당시는 중학교 입시가 있던 시절이었다. 나는 지역 명문 경북중에 응시했고 당연히 합격할 것으로 기대했다. 중앙초에서 한 해 60∼70명씩 경북중에 합격했는데 나는 최상위권 성적에 체력장도 우수했다. 그러나 탈락했다. 선생님들의 권유로, 체력장 특차전형을 처음 도입한 경북사대부중에 응시한 게 화근이었다. 경북사대부중 면접일과 경북중 필기시험일이 겹치면서 ‘이중응시 탈락’ 규정에 걸린 것이다. 다시 도전하겠다고 울고불고 매달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하늘을 찌르던 내 자존심은 무너졌다. 큰 좌절이었다. 어째서 내게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나는 오랫동안 이해할 수 없었다.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아닌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어쩔 수 없이 후기(2차)인 D중에 응시했다. 수석 합격했다. 입학식은 참석했지만 그 뒤로 등교하지 않았다. 아니, 갈 수가 없었다. 자존심 강한 어머니가 한사코 막았다. 두 달 후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교장을 만나러 갔다. 경북중에 보결(補缺)로 들어가겠다고 양해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이 학생이 2등만 했어도 허락하겠어요. 수석 학생을 어떻게 남의 학교에 보냅니까.”

이번엔 D중 교장이 강하게 반발했다. 결국 D중에 주저앉게 됐다. 그때부터 나는 집안에 있으면 필요한 말 아니면 한마디도 안 하는 반면 밖에 나가면 내 세상처럼 돌아다니는 상반된 성격으로 커갔다. 중2 때부터 담배를 물고 다녔고 불량서클에 가입해 집단 패싸움을 벌였다. 이 일로 7∼8명이 퇴학과 정학 처분을 받았는데 어찌된 일인지 나는 벌을 모면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수석 입학생인 데다 성적이 우수한 편이고 각종 과학경시대회에서 수상한 덕을 본 것 같다.

이처럼 너무 일찍 찾아온 좌절과 실패의 아픔은 너무 오랫동안 내 인생을 그늘지게 한 덫이 되고 정신적 고뇌의 진원지가 됐다.

정리=정재호 선임기자 jaehojeo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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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경북고 야구부 주장 맡아 삶의 원칙 배워

중3이 되니 ‘그래도 경북고는 가야지’ 싶었다. 당시 경북고는 전국에서 손꼽히는 명문고였다. 정신 바짝 차리고 1년 공부한 끝에 당당히 합격했다.

경북고 입학 후 새날동지회에 들어갔다. 새날동지회는 이승만정권의 독재정치가 배태한 시대적 산물이다. 1960년 4·19혁명 직전인 2월 28일 대구고 경북고 경북사대부고 3학년 학생들은 정부와 여당의 부당한 선거 개입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른바 ‘2·28 대구학생의거’ 사건이다. 이들은 대학 진학 후 새날동지회를 결성했다. 경북대 대구대 계명대 학생을 주축으로 대학팀, 경북고 경북사대부고 대구고 경북여고 대구여고 학생을 모아 고교팀을 각각 구성했다. 나는 2기 회원이 됐다.


▲ 이승율 회장(뒷줄 왼쪽)이 1965년 경북고 야구팀 주장으로 활약했을 당시
김찬석 감독(뒷줄 가운데) 및 선수들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중학교 입시 좌절로 풀리지 않은 응어리가 새날동지회를 통해 분출됐다. 시대를 변화시키는 사회사상가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 시절 내가 가장 즐겨 읽었던 책은 괴테의 ‘파우스트’였고 가장 존경했던 위인은 원효대사와 도산 안창호 선생이었다. 영혼을 팔아서까지 진리를 얻고자 했던 파우스트, 현실 참여를 통해 대중을 구원코자 했던 원효대사, 개혁주의적 민족운동가 안창호 선생을 동경했다. 당시 유행했던 실존주의 철학과 톨스토이의 ‘부활’,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보들레르의 ‘악의 꽃’,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라’, 알베르트 카뮈의 ‘이방인’, 니체의 ‘신은 죽었다’에 심취했다. 대구의 유명한 ‘돌체’라는 막걸릿집이 아지트였다.

1학년 때엔 등산부장을 맡아 팔공산 가야산 주왕산 속리산 등 태백산맥을 따라 안 가본 데가 없을 정도로 쏘다녔다. 이를 통해 신라 화랑의 후예로서 호연지기를 배웠고 경북지방 지도자들과도 안면을 익혔다. 2학년 때 야구부 창단 멤버로 들어가면서 나의 반항적 기질은 조금 다듬어졌다. 창단팀 주장을 맡으면서 팀워크의 중요성, 전략의 필요성, 권위에 대한 승복 등 귀중한 삶의 원칙을 배웠다. 이처럼 고교시절 가졌던 화려한 꿈과 실험정신은 충실하지 못했던 학업으로 인해 큰 좌절을 겪어야 했다. 연이어 서울대 입시에 실패하고 삼수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런 절망의 와중에 지금도 잊지 못할 충격적인 사건을 겪게 됐다. 경북고에 수석 입학한 중학교 동창이 자살한 것이다. 그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과 ‘수레바퀴 밑에서’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성적이 뛰어나고 온순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학업을 팽개친 나와는 대조적이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친하게 지냈다. 나의 외향적 성격과 그 친구의 내성적 성격이 묘한 콤비를 이루었다고나 할까. 고3이 되자 그 친구 누나의 권유로 그와 함께 6개월간 하숙했다. 그 친구는 내게 많은 도움을 주었지만 나는 매일 밤늦게 술 마시고 들어와 개똥철학과 궤변을 늘어놓았다.

결과적으로 그는 서울대에 낙방하고 재수해 연세대 인문계 수석으로 입학했다. 그 길로 우리 사이는 멀어졌다. 소문으로는 사귀던 여학생과 헤어지면서 괴로움을 견디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상가에 들렀을 때 친구 누나는 나를 보자 멱살을 잡고 가슴을 치며 울부짖었다.

“내 동생 니 때문에 죽었다. 니가 죽였어.” 그때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삼수할 생각도 싹 사라졌다. 나는 그의 자살에 일말의 책임이 있다는 자책감으로 한동안 주체할 수 없는 혼돈에 빠졌다. 그래서 도망치듯 군에 자원입대했다.

정리=정재호 선임기자 jaehojeo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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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종교 문제 극복하고 ‘구원의 여인’과 결혼

도망치듯 군에 가 있던 3년이 나의 패배의식과 허무주의를 치유하진 못했다. 제대 후 현실은 여전히 암담했다. 고졸 학력에 돈벌이도 없었다. 친구는 끊어졌고 나에 대한 가족의 기대는 사라졌다. 인생을 새 출발할 길을 찾지 않으면 안 되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그때 찾은 길이 결혼이었다. 1974년 1월 27살에 아내 박재숙과 결혼했다. 아내는 당시 10년간 내 곁을 지켰다. 나의 지독한 방황과 패배와 좌절을 끌어안아 주고 용기를 북돋아줬던 구원의 여인이다.


▲ 이승율 회장은 1974년 1월 고1 때 만난 아내 박재숙과 사귄 지 10년 만에 결혼했다.
왼쪽부터 부친 이종영, 처조부 박수관, 이 회장 부부, 조부 이형기, 장인 박광.

아내와 첫 만남은 경북고에 합격한 후 입학식이 있기 전 정월 대보름이 가까웠을 때다. 친구가 먼 친척뻘되는 여학생을 소개시켜 주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않자 꾀를 냈다. 당시 영남지역에는 정월 대보름 때 복조리 파는 관습이 있었는데 복조리 장사로 아내 집에 접근한 것이다.

“사실은 제가 복조리 장사가 아니고요, 따님 만나보고 싶어 왔심더.”

복조리 값을 건네려던 아내의 어머니는 내 본색을 알고 펄쩍 뛰면서 야단치셨다. 한참을 옥신각신했지만 나는 막무가내였다. 어머니는 나의 집안 내력을 들어보고 나서야 다소 안심하는 눈치였다.

“그래, 그럼 니가 교회 나가면 우리 집안에 오는 것 허락하겠다.”

나는 귀를 의심했다. 너무나 쉬운 조건이었다. 바로 약속했다. 하지만 25년이 지난 마흔 셋에야 나는 교회에 등록하고 출석했다. 내가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장인은 일본에 계셨다. 아내가 아주 어릴 때 일본에 밀항했다. 해방 전 만주 철도 건설현장에서 토목기술을 익힌 장인은 해방 후 전후복구사업에 뛰어들었다. 그곳에서 토목회사를 운영할 만큼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당시 한·일 간 국교 단절로 왕래가 어렵다보니 아내는 고3이 돼서야 아버지와 상봉했다.

그러니 남편 없이 어린 아내를 키운 장모의 고생은 상상하고도 남는다. 아내의 집안은 사육신의 한 명인 박팽년의 자손 순천 박씨 대종갓집이었다. 아내의 조부는 안동 도산서원 원장을 지냈다. 대종갓집을 지킨 장모는 아내가 3살 때 병이 났다. “교회 가면 병 고친다”는 주변 말을 듣고 아내를 등에 업고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아내는 중학교 때 대구로 나왔다. 장모는 난전에서 장사하며 아내를 교육시켰다.

아내의 순정은 강했다. 고교 시절 실존주의 계곡에서 허우적거리고 ‘재수한다’ ‘삼수한다’ 할 때도, 친구 자살 충격으로 모든 것을 접고 군대로 달려갔을 때도 나를 떠나지 않았다. 군에 있을 때 아내는 효성여자대학(현 대구가톨릭대)을 졸업했고 제대했을 땐 고려대 대학원까지 마친 상태였다. 빨리 시집가라는 장인의 재촉을 피해 서울로 올라와 대학원에 다녔다. 결국 아내의 순정은 부모를 이겼고 나는 제대 후 장인에게서 결혼 승낙을 받았다.

이번엔 나의 부모가 아내를 불러 엄명을 내렸다. 어머니가 대구불교여신도회 간부를 하셨던 분 아닌가. “우리 집안에 기독교를 받아들일 수 없으니 너는 교회 나가면 안 된다.”

이게 웬일인가. 아내도 결연했고 딱 부러졌다. “그러면 결혼 못하겠습니다.”

결국 부모님이 한발 물러섰다. “그러면 너 혼자만 나가라. 남편이나 자식에게 교회 가자고 하면 안 된다.”

이런 다짐을 받고 아내는 일단 시집을 왔다. 결혼식 풍경은 매우 독특했다. 한쪽에는 교회 목사와 성도들이 앉아 있었고 다른 쪽에는 승려와 불교 신자들이 앉아 있었다.

정리=정재호 선임기자 jaehojeo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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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전공 불교철학에 회의… 세속적 성공에 몰두

결혼해서 첫아이를 낳고 난 이듬해인 1975년에서야 나는 비로소 대학생이 됐다. 동국대 불교대학 철학과에 입학했다. 내가 불교철학을 선택한 것은 탄허(1913∼1983) 선사를 모델로 삼았기 때문이다. 탄허를 만나 공부해서 철학교수를 하면 실존주의를 뛰어넘는 사상을 정립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탄허의 정규과정 강의시간에 배우고 개인적으로도 따라다니면서 수학했다.

이 시기 나는 세속의 모든 인연에서 벗어나 있었다. 생활고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내와 둘이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집안에서 조금씩 보내주는 돈으로 겨우 살았다.

둘째 아이가 태어난 지 얼마 후 서울 갈현동 언덕 막다른 골목집에 전세 100만원을 주고 살았는데 어느 날 집달리(집행관)가 들이닥쳤다. 집주인이 사채를 써 우리 전세금마저 떼일 형편이었다. 채권자의 제안을 받고 이 집을 사서 한 달 수리해 내놓았더니 금세 팔렸다. 공사비는 물론이고 전세금을 되찾고도 100만원의 수입이 생겼다. 이 돈이 지금 운영하는 회사의 종잣돈이 됐다.


▲ 이명박 전 대통령의 서울 논현동 사저. 이 전 대통령이 1982년 현대건설
사장이었던 당시 이승율 회장이 운영하던 회사가 조경공사를 맡았다. 국민일보DB

1978년 2월 아내의 전공(조경)을 살려 서울 강남구 영동시장 앞에 40㎡(약 12평)짜리 사무실을 냈다. 당시만 해도 조경 사업은 초창기였다. 설계와 공사를 나눠 각각 종합환경계획연구소와 반도조경회사를 설립했다. 개업한 뒤 2년간 영업실적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 뜻하지 않은 기회가 왔다. 한국전력 토목부장을 만나 일본의 사례를 들어 평택화력발전소에 조경을 도입하자고 제안했다. 설계를 공짜로 해주는 대신 시공은 반도에서 맡게 해달라는 턴키베이스(일괄수주계약) 조건이었다. 이 공사에서 제법 큰돈을 만졌다.

나는 드디어 세속적인 성공에 조금씩 자신감(?)을 갖게 됐다. 당시 나는 대학원에 다녔는데 불교철학에 회의가 들던 때였다. 불교는 화두(질문)는 많았지만 답을 주지 못했다. 공허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니 세속적인 성공이 마약 같은 유혹으로 다가왔다. 이런 나의 오만에 대한 하나님의 노여움이었던 것일까. 갑자기 사고가 났다.

1980년 빗길에 아내와 택시를 타고 가던 중 교통사고를 당했다. 아내는 무려 80바늘이나 꿰맸다. 석 달 이상 부부가 입원했다. 그사이 하나님은 모든 것을 거둬 가셨다. 집 짓다 부채까지 떠안고 비닐하우스 생활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내는 나에게 눈물로 신앙생활을 권면했고 때만 되면 기도원에 가서 사나흘씩 묵고 왔다. 그러나 나는 외면했다.

1년 넘게 생활하던 비닐하우스에서 탈출하게 된 1981년 가을, 아내가 추수감사절 헌금을 하고 싶다고 했다. 무심코 그러라고 했는데, 아내는 500만원을 감사헌금으로 냈다.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어려운 그 시절에 전 재산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이미 끝난 일이니.

이듬해 우연히 현대건설로부터 조경 요청이 들어왔다. 이명박 당시 사장 집(서울 논현동 사저)이었다. 그 뒤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서울 성북동 영빈관, 계동 현대사옥, 경기도 양평 별장의 조경과 충남 서산간척지 산림복구 등을 줄줄이 맡았다. 이때 회사가 많이 성장했다.

나는 믿음을 가진 1990년에서야 아내의 기도와 헌금이, 가진 것을 모두 하나님께 바친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눅 21:1∼4)’임을 알았다. 하나님은 이를 불쌍히 여기시고 채워주셨던 것이다. 할렐루야!

정리=정재호 선임기자 jaehojeo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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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수기는 [국민일보]에 매일 연재됩니다. <감격사회>를 통해 계속 연재하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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