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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6·25전쟁과 휴전, 그리고 한미상호방위조약 배경
등록일 2020-07-27 글쓴이 관리자 조회 31

   
http://www.nacsi.or.kr
2020년 7월 27일 (월)

[특별기고] 6·25전쟁과 휴전, 그리고 한미상호방위조약 배경


양완식
前(재)한국군사문제연구원 기획실장
現밝은사회연구원 기획실장

전쟁은 아무리 잘 싸워서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한다 하여도 종전(終戰)단계에서 전쟁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면, 승전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6·25전쟁은 북한이 무력에 의한 적화통일을 목적으로 시작되었고, 북진할 당시에 우리는 통일의 기회로 활용하려고 하였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좌절되었고 다시 현상유지에 만족해야하는 상황에 봉착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휴전을 통하여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이끌어냄으로써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이승만 전 대통령의 불굴의 용기와 탁월한 외교 전략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60주년을 맞이하여 휴전협정 과정과 숨겨진 이야기를 살펴보고자 한다.

▲ 글에 포함된 내용은, 80년대 초반에 6.25전쟁에 관련된 모든 미국의 비밀자료들이 평문으로 재분류되어 일반에 공개되었던 것을 모아서, 미국의 군사 역사학자가 쓴 책의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Josph C. Goulden,Korea-The untold Story of the War, (US, Times Books), 1983

1. 6.25전쟁의 도전과 위기극복
1950년 6월 25일 새벽 0400에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은 그 자체가 국가를 수립한지 채 2년이 되지 않았던 대한민국의 존망을 가르는 위기였다.
속수무책으로 서부전선이 무너지고 3일 만에 서울이 피탈된 상태에서 미국의 트루만 대통령을 비롯한 각료들의 신속한 조치로 즉시 소집된 UN 안전보장이사회의에서 6월27일 0400부로 “북한의 공격을 무력으로 격퇴하고 국제평화와 안전을 회복한다.”는 결의를 함으로써 UN군이 북한의 침략을 무력으로 응징할 수 있는 국제법적인 요건이 갖추어졌다.
그러나 미군은 2차 세계대전 당시 1,200만 명 규모로 유지하던 군사력을 160만 수준으로 감군하였고, 더구나 대부분의 전투사단들은 나토지역에 주둔하고 있었다. 다행히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일본에 미군 4개 사단이 중·소대 단위로 분산되어 점령군으로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맥아더 사령관은 6·25전쟁이 발발한지 3일 만에 폭우를 뚫고 위험한 비행 끝에 수원비행장에서 이 대통령을 만나 전황을 설명 청취하였다. 바로 그날 영등포 일대의 전선을 시찰하면서 미 지상군 투입 없이는 북한군이 진격을 방어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하여 미 지상군투입을 미 합참에 요청하였다. 요청한지 24시간 만에 지상군 투입을 승인 받은 맥아더 장군은 흩어진 병력을 모아서 시급히 연대 전투단인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고, 24사단을 감편상태로 한국 전선에 투입하였다. 전쟁발발 1주일 만에 미군이 전선에 나타난 것은 북한군에게 큰 충격이었고, 결과적으로 북한군의 남진을 지연시키는 효과가 잇었다. 그 사이 7월 25일까지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하였다.

두 번째 위기는 1951년 1월 4일 중공군의 개입으로 서울을 다시 피탈 당하고 후퇴를 계속할 때, 미국 합동참모본부에서 UN군을 한반도로부터 철수시키는 계획을 발전시키면서 시작되었다.
미국의 수뇌부에서는 2차대전 당시 영국군의 덩케르크 철수 상황을 연상하면서 최후 수단으로 원폭을 해서라도 UN군을 구출하겠다는 의도로 원자폭탄을 분해하여 항모에 탑재한 후 동해에 대기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워커장군 후임으로 부임한 ‘리지웨이’ 8군사령관이 “현전선 고수”라는 캠페인을 펼치고, 사단장들에게 “철수시켜달라고 요청하기 위해 군사령부 오지 말고 현 전선을 고수하다 죽어서 관에 담겨서 내게 오라”는 비장한 명령을 하였으나 철수를 멈추게 하지 못하였다. 결국 8군사령관은 검렬단을 각 사단에 보내어 원인을 파악하였고, 평가 결과 사단장들이 패전의식에 빠져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러자 8군사령관은 즉시 투입된 6개 사단장 중에서 5개 사단장을 공격성이 강한 장군으로 경질시키는 모험을 하면서 결국 후퇴를 멈추게 하고 공세이전 하여 다시 38도선 부근까지 확보였다.

세 번째 위기는 1951년 7월에 시작된 휴전회담을 2년이나 끌면서 발생하였다.
사실 소련은 KGB공작으로 미국의 핵무기 기술을 빼내어 1949년 8월에 비밀리에 핵실험을 하였고, 6·25 전쟁에 막대한 전비를 투자해오던 미국은 1952년 미국이 NATO를 창설하고 70억 달러의 경제 및 군사원조를 발표하자 소련은 그해 10월에 두 번째 및 세 번째 핵무기 실험을 성공시켰다. 이런 이유들로 미국은 휴전을 모색하기 시작하였고, 소련과 중국도 더 이상 소모전쟁을 지속할 수 없는 상황에 봉착하였기 때문에 중립국 인도의 중재로 휴전회담이 성사되었다. 또한 맥아더 장군이 집요하게 주장하였던 만주지역에 대한 핵무기 사용과 폭격, 중국 해안지역 공격 등 여러 가지 방책을 요구하였지만 3차 세계대전으로 비화될 것을 우려하여 수용하지 않았다. 여러 가지 휴전 조건을 가지고 밀고 당기는 지루한 협상이 진행되면서 대두된 가장 중요한 이슈는 휴전선 설정 장소와 포로교환 문제였다.
휴전선에 관하여서는 공산군 측이 38도선을 주장하고 UN군측은 현 접촉선을 주장한 가운데, 1952년 12월 27일 공산군 측이 UN군 주장에 동의함으로써 해결되었다. 휴전조약이 발휘되는 시점으로 양측이 접촉선으로부터 각각 2Km씩 물러가서 비무장 지대를 형성한다는 원칙을 정하는데 합의하였다.
그러나 포로교환문제는 간단하지 않았다. 당시 UN군 측에서 관리한 포로 106,376명 중에 30,000여명은 복귀를 원치 않았고, 단지 70,000명만이 복귀 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 반면, 북한 측 대표 남 일은 132,000명의 포로 송환을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 과정에서 또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공산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키는 사건이 발생하여 문제는 더욱 복잡하게 되었다. 트루먼과 자유세계 지도자들은 복귀를 원치 않은 공산군 포로를 강제로 송환시킬 경우 숙청을 당할 것을 우려하는 인도주의적인 문제에 봉착하였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휴전을 반대하였던 이승만 전 대통령은, 만일 휴전하게 되면 한국군의 증강과 한미방위조약 체결 및 전후 복구를 위한 경제적 원조를 계속 요구하여 왔었다. 미국은 당시 아무런 전략적 가치도 없고 공산주의자들과 첨단에서 대치해야 하는 한국과 상호방위조약 같은 것을 체결하기 원치 않았기 때문에 한국 측의 요구를 묵살하여왔다. 그리고 공산주의자들과 마침내 휴전조건에 합의하여 휴전조약 체결이 임박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은 포로 송환문제를 가지고 공산주의자들과 타협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고, 또 휴전조건 수락에 관하여 한국의 요구 수용을 미국 측에 압박하기 위하여 1953년 6월 18일 25,000명의 반공 포로를 전격적으로 석방하였다.

그 효과는 당장 나타났다. 당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그와 같은 행위가 다시 일어나면 미군은 철수하고 원조도 없을 것이라고 협박하였다. 그러나 3년간 공산주의자들과 사력을 다하여 싸운 후 휴전이후에 대한 아무런 전략적 대책도 없이 UN군을 철수시킨다면, UN군으로 참전한 동맹국의 동의를 얻기 어려울 것이라는 것이 명확관화(明確觀火) 하였으므로 그런 협박은 공갈에 불과한 것을 미 측도 곧 깨달았다. 1953년 6월 새 중국 뉴스기관(New China news Agency)을 통하여 “이승만이 꼬리를 격렬하게 흔들어서 휴전을 벼랑에 몰아붙였다.”라는 기사를 게재하였다. 그 기사는 방공포로 석방 문제를 에피소드로 넘어가겠다는 점을 시사한 것 이였다. 그러나 아이젠하워는 그런 사태가 재발하면 큰 문제가 될 것으로 판단하였다. 실제로 반공포로 석방으로 인하여 20일정도 휴전협정이 지체되었고 ,한국군은 한 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하여 분전하다보니 UN측에 17,000여명의 전상자가 더 발생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이런 다급한 상황에 봉착한 아이젠하워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미국으로 와서 단독으로 대화하자고 요구 하였으나, 전쟁 중이므로 한국을 떠나기 곤란하다고 거절하였고, 결국 대통령 당선자 아이젠하워는 국무성 차관 월터 로버트슨 (Walter Robertson)을 한국으로 급히 파견하였고, 본인도 방한하였다.


2. 한미동맹의 체결
로버트슨과 2주간의 줄다리기를 한 끝에 한미 간에 다음과 같이 3가지 중요한 사항을 합의하였다.
① 휴전 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② 한국군을 20개 사단으로 증강
③ 중장기 경제원조로 총 10억 달러 제공
이승만 대통령은 마침내 1953년 7월9일 한국은 휴전조약에 서명하지는 않지만 휴전에 동의한다는 다음과 같은 취지를 서면으로 로버트슨에게 보내었다.

“휴전협정에 의하여 우리의 국가 생존에 해로운 방책이나 조치가 취해지지 않는 한, 우리는 휴전에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정치적으로 평화통일을 달성하는데 전심을 다하여 진정으로 협력하기 위하여 노력할 할 것이다.”

UN군은 공산 측에 이 대통령이 휴전에 동의한 것과 한국군이 더 이상 공세적 활동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통보하고, 휴전회담을 재개하였다. 휴전의 마지막 절차가 일사천리로 마무리되어 7월27일 휴전을 선포하였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휴전 직후인 8월 9일에 서울에서 가조인되었고, 1953년 10월 1일 워싱턴에서 조인되었다. 이를 시행하기 위해 1년간 추가적인 협의를 거쳐 1954년 11월에 한미 합의의사록을 체결하였는데, 주요 사항은 아래와 같이 본래 합의한 사항보다 더 많은 것을 얻어내었다.
① 한국이 외침을 당할 경우 미국은 헌법적 절차를 거쳐 미군을 한국전에 개입 시킨다.
② 한국에 미군의 주둔을 허용함으로서 미군이 인계철선의 기능을 발휘하게 한다.
③ 미국의 군사원조로 한국군의 규모를 70만 수준으로 증강한다.
④ 미국의 경제원조로 한국의 전후 경제복구를 지원한다.


3. 결론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분명 이승만 대통령의 위대한 외교적 승리였다. 휴전 당시 복잡하게 돌아가는 국제적 상황을 잘 파악하고 당시의 세계 최강국이었던 미국의 정책을 변경시켜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얻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10만 명에 불과하였던 한국군은 70만 명의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게 되었고, 경제원조가 병행되어 전후복구를 할 수 있었다.

그 후에도 한국의 상품을 미국에 무제한 수출하게 하여 경제발전에 기틀을 마련하여주었고, 휴전 이후 여러 번 결정적인 도발이 있을 때마다 한미동맹으로 북한은 주변 강국으로부터 울타리역할을 해주었다. 또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안보의 울타리 역할을 하여 주었기 때문에 민주화도 가능하였던 것이다.

현 시점에서 전시 전시작전권 환수문제 등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중요성이 다시 부 각되고 있다. 우리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어떻게 체결되었는지 그 뿌리가 바로 6·25 전쟁과 휴전협정 과정에서 미국이 원치 않은 것을 이끌어 낸 것을 알아야 한다. 이제 미국이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중요성을 더 강조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감회를 새롭게 한다. 이는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의 위상이 크게 신장되었기 때문이고, 한편으로 미국의 아시아 중시 정책을 추진하는데 한국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자손만대에 이르는 안전보장과 한반도 통일을 위한 중요한 안보의 축으로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의 발전적인 미래를 생각해야 할 때이다.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고, UN이 공인한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었으며, 6.25의 최대 국난을 극복한 이승만 전 대통령은 진정한 국부이다. 그런데 일부 세력들이 그런 분에 대하여 친일파란 플레임을 씌우고, 매국노로 칭하며, 이승만 정권을 미국의 괴뢰정권이라고 말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는 북한 김일성으로부터 날조된 것이고, 종북주의자/주사파들이 주장한 것이지만, 역사의 진실은 가릴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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